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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규인 수필] 낫

연규인 운영위원 | 기사입력 2019/07/15 [19:03]

[연규인 수필] 낫

연규인 운영위원 | 입력 : 2019/07/15 [19:03]

나는 낫질을 못한다. 어릴 때 시골 가면 낫을 잡아보기는 하였지만 생각같이 낫질이 쉽지 않았다. 시골에서 자란 같은 또래의 사촌은 능숙한 낫질로 그가 ‘꼴’을 베고 지나간 자리는 마치 ‘바리깡’으로 짧게 스포츠머리를 깍은것 처럼 깔끔하며 지게의 한 짐 분량도 순식간에 끝낸다. 나는 따라가서 꼴을 베는 것이 아니라 긴 풀만 한 움큼씩 잡아 뜯어내는 수준이었다. 

 

▲ [단원풍속도첩]중 [대장간]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낫의 기원을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무속신화(巫俗神話)에 천궁대왕(天宮大王)과 옥진부인(玉眞夫人) 사이에서 태어난 성조대감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와서 인간에게 집을 지어주려고 각종 연장을 만들었는데, 낫은 이 중 하나라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인류 역사학으로는 신석기시대부터 돌낫을 사용하여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쇠낫으로 발전하여 오늘 날에 이르렀다. 낫의 모양과 특성은 각 나라의 기후와 식물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따뜻한 나라에서는 자루가 길고 날이 큰 ‘대 낫’(Scythe)의 형태도 있는데 대부분은 우리나라에서 쓰는 낫과 비슷한 ‘짧은 낫’(Sickle)으로 존재한다. 

 

원시공동체가 붕괴된 이후의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 공산주의는 착취당하고 억압 받는 농민을 ‘낫’으로 ‘망치’는 ‘프롤레타리아’로 상징하여 ‘부르주아지’로부터 해방하고자 하였으며 예전의 소련은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로 ‘낫과 망치(☭)’를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어릴 때 시골에서 본 낫은 땔감을 구하기 위해 나무의 곁가지를 쳐 내는 날이 두꺼운 조선낫과 소먹이용으로 논두렁 등의 꼴을 베는 날이 얇은 왜낫이 있었다. 집에는 여러 개가 있었지만 임자가 따로 다 있어 내가 함부로 만지지도 못하였고 특히 몸집이 작으신 외할머니의 낫은 자루는 짧고, 날은 작았으며 왼손잡이 날로 대장간에서 특별히 제작한 것으로 만지면 크게 혼났다. 

 

새마을 운동이 한 창이던 시절에 농사용 비료가 부족하여 집 마당 한 구석에는 풀을 베어다가 산더미처럼 쌓아 부숙(腐熟)시켜 퇴비를 만들어 비료 대신 사용했다. 여름 방학이면 퇴비용 풀베기를 도와주기 위해 낫을 달라하면 손에 주어지는 것은 거의 사용을 안 하여 날은 무디고 녹슬었기에 숫돌에 갈아서 쓸려면 잘못 갈다가 숫돌만 버린다고 가는 것도 사촌들이 대신 갈아주었다.

 

이후 어른이 되어 낫의 사용은 해마다 집안이 모여 벌초하기 위해 산소 주변의 나무치기가 전부였다. 어느 해에는 주변을 잘 살피지 못하고 땅속에 사는 땡피(땅벌) 집을 건드려 무방비 상태에서 엄청난 벌 떼에게 무자비하게 쏘여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얼굴과 손은 퉁퉁 부어 오른 채 일을 빨리 마무리 하려고 무리하게 낫질을 하다 그만 왼손의 약지를 사정없이 베어 급히 병원에 가서 봉합치료를 받은 적도 있었다. 아직도 그 훈장은 생생이 남아있고 그 후로는 낫을 대신하여 예초기를 사용하고 있다. 

 

예전의 낫은 더 많은 곡식을 얻기 위하여 농업용 도구로 없어서는 안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수확용 기계, 예초기 등 대체 농기구의 발달로 낫의 사용은 간단한 작업용으로만 이용되며 그 모양도 용도에 따라서 각양각색이다. 이제 더 이상 낫은 억압과 가난의 상징도 아니며, 낫을 본 적도 없는 세대에 낫과 기역자를 연결시키는 속담도 밀리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나의 손가락에 서툰 낫질로 여전히 상처가 남아있듯 낫도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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